남촌칼럼

초대 교장 시비(詩碑)의 비밀

남촌 윤승식 2016. 10. 7. 16:14

 

2년 전 해남중학교에 국어교사로 발령받아 근무하던 어느 날, 나를 무척 설레게 한 일이 있었다. 중학시절 교장 선생님이셨던 춘곡 최병량 선생님의 시비를 본교에서 우연히 발견했기 때문이다. 교문 한 쪽에 외롭게 서있는 시비에는 <초대 교장 최병량>께서 학생들에게 자나 깨나 학문에 열중하라는 내용의 시가 새겨져 있었다.

오늘에 내가 할 일 내일로 미루지 마소.

내일이 오고 또 온들 내 할 일 그 날 그 날

인생을 짧다만 말고 부지런히 일하고저

하지만 본교 교장실에 걸려 있는 초대 교장선생님 사진은 춘곡 최병량 선생님(이하 춘곡 선생님’)이 아닌 다른 분으로 되어 있는 것 아닌가? 그러면 왜 초대 교장도 아닌데 초대 교장이라고 시비에 새겨져 있을까? 그래서 알아보았더니1949년 해남공립중학교 4대 교장에 부임하였다가 1951년 해남중해남고로 분리되는 과정에서 혼선이 빚어진 것으로 보인다. 해남고등학교에 1950년부터1953년까지 초대 교장으로 근무했음이 밝혀졌다. 해남고는 해남중에서 분리되어 다른 곳으로 옮겼지만 초대 교장 선생님의 시비는 홀로 해남중에 남아있는 것이다. 한 때 시비가 교정에 방치된 적도 있었지만 1980년대 초에 교문을 옮기면서 현 위치에 있게 되었다.

이후 춘곡 선생님은 19534월에 보성 조성중학교에 초대교장으로 부임하셨다. 1955년에 학생들에게 프린트하여 나눠주었던 시이다.

남 잘못 있다고 흉 보지마소

많을 일 하다보면 내 잘못도 있을 것을

남 잘못 거울삼아 내 잘못 고치소서

지름길 가려다가 험한 길에 빠져

허다히 방황함이 인생의 길 일러라

바른 길 갔으면 방황함이 없을 텐데

학생들에게 남의 잘못된 행동이나 말도 자신의 인격을 수양하는데 도움이 되게 하라는 반면교사 (反面敎師)의 교훈을 말해주고 있다.

춘곡 선생님은 19653월부터 19702월까지 강진중강진농고(현 전남생명과학고)의 교장으로 계시면서 열정적으로 학교 운영과 시작 활동(詩作活動)을 하였다.

중학시절 필자가 본 춘곡 선생님은 카랑카랑하시면서도 열정적인 교육자이시고, 예술가이셨다. 자가용, 오토바이 타기도 힘든 시절 오토바이125cc급을 교정을 싱싱 타고 다니시어 붙은 별명이 오빠시였다. 강진 작천 출신이었던 춘곡 선생님은 강진에서 작천으로 넘어가는 까지내재짧고 험한 인생길을 잘 극복하자는 내용의 시비를 세운다.

까치내재 넘어가기 숨도 차고 고달프니

사람 길에 비긴다면 넘기 쉬운 길일러라

조심해 잘 살며 넘세 짧고 험한 한 평생길

목포상업고등학교, 목포제일여고 교장으로 있으시다가 정년퇴임을 하셨다. 1985년에 작고하셨다. 춘곡 선생님은 단순한 교육자가 아니라 시화를 두루 갖춘 예술가이기도 하셨다. ‘호박을 소재로 한 호박의 自負(자부)’란 서화를 즐겨 그리셨는데, 그 서화가 강진의 모병원과 경주의 모식당에서 걸려있는 것을 보았다. 가는 곳마다 사재를 털어 시비를 세우고, 술 한 잔에 호박 그림을 남기셨다. 중학 동창인 우수영중학교 교장인 황시하 친구는 지금 그 서화를 보관하고 있고, 우수영중학교에도 걸려있다고 전했다. 그 서화에 실려 있는 호박의 自負(자부)’란 시를 옮겨본다.

 

호박꽃이 꽃이냐 비웃음을 받고요

울퉁불퉁 둥글 납작 내용은 보기 흉해도

겉만 보고 속단 말고 사람이나 호박입네다.

난 속살 단맛 있고 영양가 높고

침을 놔도 까닥 않는 참을성 좋고

마음씨 둥글어 모가 없으니

겉 밉고 속 예쁜 호박입네다

춘곡 선생님께서는 외모의 아름다움보다는 내면의 가치가 더 중요함을 이야기하고 계신다. ‘외모가 능력이다라고 하는 외모지상주의가 판을 치는 오늘날, 춘곡 선생님은 우리에게 삶의 큰 교훈을 던져주고 있다.

한국전쟁이라는 어려운 시기에 해남 교육에 열정을 바치고 시비 하나 남기고 떠나신 춘곡 선생님!

해남고교가 아닌 해남중에서 외롭게 서있으면서 50년 전의 제자가 오기를 기다렸던 것일까?

오늘따라 새삼 춘곡 선생님이 그리워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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