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칠원윤씨(漆原尹氏) 족보에 우리 해남윤씨(海南尹氏) 6세조 좌의정공(左議政公) 환(桓)과 이름과 관직(官職)이 똑같은 분이 그들의 고려말 중세조(中世祖)로서 기록되어 있다. 고려사(高麗史)와 칠원읍지(漆原邑志)에도 이 분들의 이름과 관직(官職)이 똑같이 실려있다. 그러므로 「우리 해남윤씨(海南尹氏) 선조(先祖)와 칠원윤씨(漆原尹氏) 선조(先祖)가 동일인(同一人)으로서 같은 집안」이다는 문제가 옛날부터 있었다고 우리 족보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면 다음에 고려사(高麗史), 칠원읍지(漆原邑誌), 칠원윤씨(漆原尹氏) 보록(譜錄)에 나타난 기록을 살펴본다.
㉮ 고려사(高麗史)에는 우왕(禑王) 때에 정승 윤환(尹桓)이 사직하고 고향 칠원(漆原)으로 돌아갔다 하였고,
㉯ 고려사(高麗史) 망기(網紀)에는 우왕(禑王) 6년(1379)에 윤환(尹桓)이 정승이 되었으며 우왕11년(1384)에 별세하였다 하였고,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이조 성종 9년 편찬)에는 고려(高麗)때 윤환(尹桓)은 오조(五朝,고려 충혜왕부터 우왕까지)를 벼슬하면서 3번 수상(首相)이 되고 칠원군(漆原君)으로 봉작(封爵)된 분이며 그 아들은 잠(岑)이니 사마(司馬)라 하였고,
㉱ 칠원읍지(漆原邑誌)에는 윤정승(尹政丞) 환(桓)이 있는데, 그 아들 이름이 처음에는 녹화(祿和)였지만 나중에 잠(岑)이라 하였는 데, 벼슬은 진사(進士)였고,
㉲ 칠원윤씨(漆原尹氏) 족보에는 환(桓)(고려와 이조 정승)은 5형제인데 아들이 없어 그 둘째 동생 장(樟)의 아들 윤천효(尹天斅)를 입양하여 대를 잇게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두 분의 사적(事蹟)을 사기(史記)와 족보의 기록에서 대조하여 표로 정리해 보면,
구분
사기 와 족보 |
칠원윤씨 선조 윤환 |
구분
사기 와 족보 |
해남윤씨 선조 윤환 | ||||||
이름 |
관명 |
아들의 이름과 관명 |
거소와 재세 연대 |
이름 |
관명 |
아들의 이름과 관명 |
거소와 재세 연대 | ||
고려사 |
○ |
○ |
|
○ |
고려사 |
○ |
○ |
○ |
× |
고려사망기 |
○ |
○ |
|
○ |
고려사망기 |
○ |
○ |
○ |
× |
동국여지승람 |
○ |
○ |
× |
○ |
동국여지승람 |
○ |
○ |
○ |
× |
칠원읍지 |
○ |
○ |
× |
○ |
칠원읍지 |
○ |
○ |
○ |
× |
칠원윤씨족보 |
○ |
○ |
× |
Ø |
칠원윤씨족보 |
○ |
○ |
× |
× |
※ ○서로 같은 표 × 서로 다른 표 Ø不明표
위 표에서와 같이 몇 항목을 가지고 해남윤씨(海南尹氏)과 칠원윤씨(漆原尹氏)를 대조해 보면 ㉮항(項)부터 ㉱항(項)까지의 사실(史實)은 칠원윤씨(漆原尹氏)윤환(尹桓)과 우리 해남윤씨(海南尹氏) 윤환(尹桓)과 이름과 관직은 물론 그 아들의 이름과 관직까지 똑같이 되어있다. 그러나 ㉲항(項) 칠원윤씨(漆原尹氏) 족보에는 두 분의 이름과 관직만 같을 뿐이요, 그 선조(先祖)의 이름과 그 아들의 이름과 관직이 우리 해남윤씨(海南尹氏) 선조(先祖,녹화)와 전혀 다르며,그들의 보록(譜錄)에 나타난 아들이 거읍(居邑)인 칠원읍지(漆原邑誌)의 기록과 전혀 다르다는 것은 큰 모순이다.
우리 선인(先人)들은 여러 기록을 고증해보고 다음과 같이 몇 가지를 전해 주셨다.
첫째, 고려사망기(高麗史網紀)에 우왕(禑王) 11년(1385)에 칠원의 윤정승이 돌아가셨다고 했는데 이때는 바로 영동정공 윤광전(尹光琠)께서 소윤공 윤단학에게 노비급부하셨던 지정(至正) 14년(1354)보다 31년 후이니 두 분의 재세연대(在世年代)가 서로 맞지 않으며,
둘째, 설사 두 분이 같은 사람이라 보고 장수(長壽)하여서 손자가 증손자에게 노비급부함을 보았다고 가정하더라도 현재 우리가 보존하고 있는 노비문서(광전께서 소윤공 단학께 급비하신 문서. 병진보 1권 참조)를 보면 위업과 공이 빛난 살아있는 정승의 차손(次孫)이 탐진감무(耽津監務)에게 제출한 문서로는 그 체모와 격식이 너무 저자세(低姿勢)라는 느낌이 있으며,
셋째,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실린 윤정승은 칠원읍(漆原邑) 인물이 확실하며( 여지승람은 칠원 윤정승이 1385년에 돌아가신 후 1393년 당시 노사신)이 편찬했으니 고려 때의 이름난 재상의 돌아가신 연대를 모를 수가 없음) 우리 선조 윤정승은 급비문서(給婢文書)로 보아 탐진현에 살아계심이 확실하니 같은 사람이라고 단정할 수 없으며,
넷째, 칠원읍지에는 윤정승의 아들이 처음엔 녹화(祿和)였지만 후엔 잠(岑)으로 되어있어 우리 선조(先祖)와 똑같지만 칠원윤씨 보록에는 아들이 없어 조카 윤천효(尹天斅)로 하여금 대를 이었다고 하므로 그들의 보록 또한 믿을 수가 없다.
이러한 몇 가지 이유로 인하여 해남윤씨(海南尹氏)와 칠원윤씨(漆原尹氏)가 본시 같은 조상이었다가 후에 분파되었다」는 말은 「이유와 근거없이 추측만으로 할 말이 못된다」고 써있고 또 해남윤씨 17대손 윤정기(尹廷琦,항촌파,호는 방산) 는 「칠원의 윤정승과 우리 선조 윤정승과는 우연적으로 이름이 같을 뿐이지 결코 같은 사람은 아니다.」하였다. (병진보 제1권 17항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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