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해남윤씨 시조공(始祖公) 이하(以下) 칠세조(七世祖)의 휘함(諱啣)과 가계(家系)는 확실하나 그 생졸(生卒)과 배위(配位)와 묘소(墓所)와 여타 공덕(功德)이 실전(失傳)되었음은 참으로 통탄할만한 일이다. 고려 초에는 왕계(王系)나 득성가(得姓家) 또는 일찍 창성자(創姓者) 이외에는 성(姓)을 가진 자가 별로 많지 않았었다. 그러나 고려(高麗) 중엽(中葉) 문종(文宗)(1047-1082) 때에 이르러 중국의 과시제도(科試制度)가 도입되어, 과거에 응시하려면 반드시 성명,이력과 그 선조의 열역(閱歷)을 밝혀야 했으므로 이때까지 성(姓)없는 사족(士族)들은 성(姓)을 만들고 가계(家系)를 명확히 해야했다. 따라서 그들은 상세(上世)부터 이름을 전해 온 선조(先祖)나 고려사(高麗史) 열전(列傳)에 나타난 선조(先祖)를 찾아 이를 뿌리 삼아 가계(家系)를 정립하고 성(姓)을 만들어 가첩(家牒)과 가승(家乘)을 만들고 보전하게 되었는데, 오늘날 족보(族譜)처럼 체모(體貌)가 갖추어 기록한 것이 아니라 주로 부자(父子)관계등 가계(家系)만을 알 수 있도록 간단하게 기럭하여 보전하는 것이 통례였다.
이 같은 간이한 가첩가승(家牒家乘) 제도(制度)는 현대 족보의 맹동기(萌動期)였던 이조(李朝) 성종(成宗) 때에 이르러 기재방식(記載方式)이 구체화(具體化)되기 시작했다. 우리 윤씨(尹氏) 대동보(大同譜)도 이조(李朝) 숙종(肅宗)때(1702년)에 비로소 창간되었으니, 그 이전의 고려 때의 선조(先祖)의 사적(事蹟)을 가첩가승(家牒家乘)에 기재된 사실(事實) 이외에 알 수가 없었다. 그때까지 각파(各派)에서 보전(保傳)해온 가첩가승(家牒家乘)을 근거로 하여 사실(事實) 그대로를 수록했기 때문에 휘함(諱啣)과 가통(家統)은 분명하나 여타(餘他) 사적(事蹟)은 실전(失傳)될 수 밖에 없었으니, 선인(先人)들의 불찰이라기보다는 600여년 동안 가첩가승(家牒家乘) 위주로 했던 시대적 흐름 탓이라 할 수 있다.
무릇 나무는 뿌리가 튼튼하면 잎이나 가지가 무성하고 인간은 시조(始祖)가 어질면 자손(子孫)이 번창하게 됨은 생물(生物) 자연(自然)의 이치와 같다. 우리 시조공(始祖公) 부군(府君)은 우리 후손(後孫)의 뿌리이시니 비록 사적(事蹟)이 실전(失傳) 되었으나 자손(子孫)이 한 없이 번창하여 1000여년동안 유구(悠久)히 시체가성(詩體家聲)을 지켜오니 이는 오로지 부군(府君)께서 사시는 동안 거룩하신 공덕(功德)을 쌓아 여음(餘蔭)으로 우리들을 감싸주신 덕택이라 생각되니 설사 사적(事蹟)이 실전(失傳)되었다 한들, 우리 후손들의 부군(府君) 기리는 정(情)이 조금이라도 훼손(毁損) 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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