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남윤씨

6. 우리나라 족보제도의 발전과정

남촌 윤승식 2013. 8. 4. 11:04

우리나라 족보법(族譜法)은 중국에서 모방하여 왔다. 중국은 옛부터 왕실의 족보(族譜)제왕년표(帝王年表)가 있었으며 한()나라 때에 이르러서는 현량과(賢良科)(관리임용시(官吏任用試)) 에 응시하기 위해서는 개인과 조상이력을 적어 그 가계(家系)를 밝혀야 했으므로 이 때부터 개인(個人)이 족보(族譜)를 갖게 되었다.

우리나라 족보(族譜) 또한 왕실(王室) 족보(族譜)부터 시작되었다. 고려(高麗) 중엽(中葉) 이후 편찬한 왕대실록(王代實錄)선원록(璿源錄)이 우리나라 족보(族譜)의 효시(嚆矢). 우리나라도 고려 문종조(文宗朝)부터 중국 제도를 본따 과거시험에 응시하려면 성명(姓名)과 가계(家系)를 꼭 표시해야 했으므로 사족(士土)들은 이 때부터 거의 대부분 성()을 정하고 가첩(家牒)과 가승(家乘)을 마련하니 이것이 뒷날의 족보(族譜) 발전하였다.

우리 나라 족보(族譜)로서 처음으로 족보 형태를 갖추어 발간한 것은 이조(李朝) 명종(明宗) 17 (1652)에 나온 문화유씨(文化柳氏) 족보(族譜)가정보(嘉靖譜). 이 족보(族譜)가 우리나라 족보(族譜) 편성의 모형이 되고 있다.

그 후() 임진왜란(壬辰倭亂)을 겪고 난 후 사회(社會)는 혼란하고 문헌(文獻)이 많이 유실됨에 족보(族譜)에 대한 관심은 일시적으로 침체되었으나 숙종대(肅宗代)(1675-1720)에 이르러 많은 성씨들의 족보(族譜)가 쏟아져 나왔다.

이는 물론 그 당시(當時)의 시대상(時代相)이 족보(族譜)가 없으면 상민(常民)으로서 벼슬길이 막힐 뿐 아니라 군역(軍役)을 맡게되는 등 사회적 차별대우를 받게 됨에 족보(族譜)에 대한 선호(選好) 관념이 컸기 때문이도 하지만 그 보다는 우리 민족성(民族性) 전통적으로 선조(先祖)를 추모)하고 부모에게 효도하며 형제와 씨족간에 우애있는 효우정신(孝友精神)과 윤리관념(倫理觀念)이 유난히 독실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 우리 해남윤씨(海南尹氏) 족보(族譜) 또한 숙종조(肅宗朝) 25(임오년,1702)에 창간(創刊)하였다. 임오보(壬午譜) 이전에는 각파(各派) 각댁(各宅)에 전해져온 가첩(家牒) 가승(家乘)이 있었으니 이를 근거(根據)로 집대성(集大成)한 최초(最初) 대동보(大同譜). 그 후 227년 후인 기사년(己巳年)에 중수(重修)였으며 그 후 다시 47년 후인 병진년(丙辰年)에 삼수(三修)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