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남윤씨

4. 성(姓)의 보편적(普遍的) 사용 시기

남촌 윤승식 2013. 7. 29. 14:49

고려 문종(文宗)때 이르러 우리나라 에서도 비로소 중국의 과거제도(科擧制度)를 모방하여 관리(官吏)를 등용하게 되었다. 따라서 과거응시자(科擧應試者)는 반드시 자기의 성명(姓名) 이력(履歷)과 부조(父祖)의 이력을 표시해야 했기 때문에 출세를 바라는 사대부가(士大夫家)에서는 꼭 성()을 가져야 할 형편이었다. 이 때문에 많은 사족(士族=상류계급)들은 윗대에 유명한 선조(先祖)나 혹은 고려사열전(高麗史列傳)에 나타난 선조(先祖)를 추적하여 이를 뿌리 삼아 가계(家系)를 정립하고 성()을 제정하며 가첩(家牒)과 가승(家乘)을 만들어 보전하게 되었다. 그러나 처음에는 이 가첩(家牒)가승(家乘)에 주로 선조(先祖)와 자신과의 연계 관계를 간단하게 기재 하였으나 이조(李朝)에 들어 상신록(相臣錄) 공신록(功臣錄)등 문헌(文獻)의 출현으로 인하여 조손간(祖孫間)의 계통(系統)과 소목(昭穆)과 사적(事績)등이 더욱 명확해짐에 따라 이것이 장차 이조(李朝) 중엽에 이르러 성행한 명성(名姓家)의 족보(族譜) 기초자료가 된 것이다.

(여기에 우리가 유의(留意)할 것은 우리 해남윤씨(海南尹氏) 시조공휘존자부부군(始祖公諱存字富府君)의 재세년대(在世年代)는 고려중엽(高麗中葉)으로 추정(推定)된다. 아쉽게도 문헌(文獻)이 없어 해남윤씨의 성씨가 만들어진 경위를 알 수 없으나 앞서 말한 논지로 미루어 볼 때 우리 선조(先祖)는 이미 고려(高麗)때에 가첩(家牒)과 가승(家乘)을 보유(保有)한 사족(士族)임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