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가지

다시 생각하는 호남의 의와 예

남촌 윤승식 2013. 7. 4. 11:25

선조들이 이룬 의향, 미향 위기의 순간엔 항상 호남이 일어섰다

 

광주의 대표적인 거리가 충장로와 금남로다. `충장로’는 충장로 입구에서 유동까지를 말하며 간신의 모함으로 29세 젊은 나이에 숨을 거둔 임진왜란 때 의병장 김덕령 장군을 추모하는 거리다. `금남로’는 도청 앞부터 발산교까지를 말하며 임진왜란과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공을 세운 정충신 장군을 추모하는 도로이다. `경렬로’는 광주역부터 농성 지하도까지를 말한다. 고려 때 문신이자 고려 수군 창설의 주역인 정지 장군을 추모하는 도로이다. `제봉로’는 남광주역부터 광주역까지를 말한다.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킨 의병장 고경명을 기리는 거리이다. `구성로’는 광주고 앞부터 월산 로타리까지를 말한다. 정묘호란 때 침략하는 여진족을 맞아 싸운 전상의 장군의 추모하는 도로이다.

 `고봉로’는 흑석 4거리부터 광산동까지 거리를 말한다. 조선 중기 뛰어난 주자학이자인 고봉 기대승을 추모하는 도로이다. `눌재로’는 서창 검문소부터 칠석동까지를 말한다. 조선의 문인 눌재 박상을 추모하기 위한 거리다. `사암로’는 송정 고가도로부터 비아 IC까지를 말한다. 영의정을 14년간 재임한 청백리 사암 박순을 추모하는 도로이다. `필문로’는 남광주 4거리부터 서방 4거리까지를 말한다. 강등된 무진군을 광주목으로 승격시킨 필문 이선제를 추모하는 도로이다. `죽봉로’는 농성 지하도부터 동운고가도로까지를 말한다. 조선말 의병장 죽봉 김태원을 추모하는 도로이다.

 광주에서는 선술집 또는 중국집 아니면 가정집을 가더라도 반드시 동양화 한 폭은 걸려 있다. 예술을 즐기는 사람이 많거나 예술가를 많이 배출한 고을을 `예향’ 이라고 한다. 허유는 허균의 후손으로 어려서 윤선도의 고택인 해남 녹우당에서 공재 윤두서를 따라 배웠다. 그리고 대흥사의 초의선사 소개로 추사 김정희를 만나 수업을 받았다. 남종화의 시조인 왕유의 자를 따라 `유’라고 이름을 고쳤고, 남종화의 대가인 대치 황공망의 호를 따라 `소치’라고 했다. 소치 허련이 말년에 고향 진도에 운림산방을 짓고 은거하면서 그림에 몰두했다. 그의 화풍은 아들인 미산 `허형’과 손자인 남농 `허건’ 그리고 의제 `허백련’ 등으로 계승되었다. 허유는 그림 시문 글에 능해 `소치삼절’로 불리기도 했다.

 남해와 서해의 소금 젓갈 해산물이 풍부하고 넓은 호남평야와 노령산맥이 있어 쌀과 보리 야채 나물이 풍부했다. 따뜻한 남녘의 기후를 극복하기 위해 남도의 음식은 맵고 짜며 자극적인 맛이 특징이다. 전라도는 최고의 유배장소로 다양한 문화가 유입되었다. 그리고 전주 해남 광산 양반들과 천석꾼 만석꾼 부자들과 많아 제사와 잔치도 많았다. 결국 음식이 다양하고 사치스럽고 화려하다.

 전주 비빔밥, 벌교 꼬막정식, 남원 추어탕, 영산포 홍어, 나주 곰탕, 송정리 떡갈비, 영광 굴비, 무안 세발낙지, 무등산 보리밥, 여수돌산 갓김치, 약산 흑염소, 순창 고추장 등 너무나 맛있는 음식이 많다.

 전라도는 임진왜란 직전에 발생한 기축옥사로 호남 사람들이 멸문지화를 받아 다시 인재가 나오려면 400년은 지나야 한다고 했다. 기축옥사는 정여립의 모반사건이 일어나자 정철을 비롯한 서인들이 옥사로 확대해 호남사람 1000여 명을 학살한 사건이다. 이발과 최영경을 처형하고 이산해와 정인홍 등을 쫓아냈다. 그리고 기축옥사 이후 호남은 반역향으로 지목되어 인재 등용에서 심한 차별을 받았다.

 신흠은 `오동나무는 천 년이 지나도 변함없이 곡조를 간직하고 매화는 일생 동안 춥게 살아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 달은 천 번을 이지러져도 그 본질은 남아 있고 버드나무는 백 번을 꺾여도 새 가지가 돋아난다’는 시조를 남겼다. 이순신 장군은 `약무호남 시무국가’라고 했다. `의향’ 광주 `예향’ 남도 `미향’ 전라도는 조국이 위기에 처하면 언제든지 일어나는 자랑스런 고장이다. 사람 좋고 볼 곳 많고 먹을 것 많은 호남은 아름다운 고장이다.

서일환<광주전남의료발전협의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