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츠서울닷컴ㅣ장 민·박형남기자] “김대중 전 대통령을 많이 닮은 것 같아요?” 특수부 출신이었던 민주당 박주선 최고위원에게 던진 말이다. 박 최고위원은 “그런 말을 많이 듣는다”라며 멋쩍은 웃음을 지어보였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미국·일본 등지에서 박정희 정권에 맞서 민주화운동을 주도하다가 1973년 도쿄의 한 호텔에서 중앙정보부(지금의 국가정보원) 요원에 의하여 국내로 납치(김대중 납치 사건)되어 세계의 이목을 받았다. 박 최고위원도 3번의 구속, 3번의 무죄를 받으면서 세간의 화제를 몰고 다녔다.
또 정치 탄압 등 산전수전을 다 이겨낸 박 최고위원은 지금은 당 지도부 내에서 유일한 ‘호남 최고위원’이자 호남 민심을 대변하는 중량급 인사로 성장했고, 김대중 전 대통령 역시 거친 역경을 모두 이겨내고 대통령에 당선, 화려하게 부활 제2의 인생을 맞이했다. 이 정도만 해도 두 사람이 걸어온 길은 공통점이 많다.
박 최고위원에게 그 당시 심정을 물었다. 그는 “대검 중앙 수사부, 서울지검 특수부 등 검사 생활 4분의 3을 보냈던 곳으로부터 당하는 일이라 정말 많은 생각이 들었죠. 너무 많은 사람들을 구속해서 하늘이 노해서 그런 것일까…”라며 “눈물도 많이 흘렸어요. 아마 세상에 나 같은 사람은 없을 거예요”라고 말한다. 한량이었던 아버지의 무관심, 이복동생의 출현, 정치적 탄압에 의한 구속과 지역구 분열 등 박 최고위원의 인생은 가히 ‘롤러코스터’ 같다. 시련의 거친 파도를 이겨낸 박 최고위원과 함께 추억여행을 떠나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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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최고위원에게 어머니는 ‘정신적 지주’다. 어머니에 대한 얘기만 나와도 눈물을 보이는 이유도 파출부, 과일, 쌀, 달걀 장사 등을 하면서 산전수전을 다 겪었던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르기 때문이다. “중학교 입학할 때 돈이 없었어요. 어머니는 등록금 1천1백원을 마련하기 위해 병원에서 피를 팔았어요. 게다가 새벽 4시에 광주행 통학열차를 통해 장사를 하시던 어머니 모습은 지금도 생생해요. 탁송료 등을 내기 싫어 통행금지 시간이 풀리기 전에 역사에 가서 쌀, 채소, 달걀 등을 미리 차에 실었어요. 한 번은 통행금지 해지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통행을 했다는 이유로 파출소에 붙잡히기도 했어요. 경찰관에게 어려운 사정을 말하자 파출소에서 양해를 해주기도 했죠. 어머니는 자식들을 위해서 정말 독하게 사셨던 것 같아요.”박 최고위원은 어머니의 희생정신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그는 정상궤도에서 일탈하지 않고, 공부만 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반면, 아버지와의 추억은 별로 없다. 어렸을 때부터 가족들에게 관심을 쏟기보다 사업에 열중했다. 결과는 참담했다. 사업 실패로 가세가 기울었고, 뜻하지 않은 가족까지 생겼다. “여동생 두 명이 이복동생이에요. 처음에는 많이 흔들렸어요. 여동생에 대한 신분 확인도 하고, 우범지대에서 놀아볼까 생각했어요. 그런데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어요. 어머니 때문이죠. 정말 남몰래 눈물도 많이 흘리면서 모든 걸 다 감수하고 다 받아들였어요.”
그래서일까. ‘초등학생 박주선’은 나이답지 않은 성숙함이 물씬 풍겼다. 이러한 악전고투의 경험은 그를 더욱 단단하게 만드는 중요한 요소가 됐다.
박 최고위원의 학창시절은 단 한마디로 표현할 수 있다. ‘공부만 한 학생’. 중학교를 수석으로 입학한 이후 각 학교 수석들만 입학한다는 광주고에 진학했다. 박 최고위원은 학창시절 공부밖에 몰랐고, 할 줄 아는 것도 공부였다. ‘나홀로’ 유학생활을 하는 중에도 그는 일탈 한 번 하지 않고, 전체 수석을 단 한 번도 빼앗기지 않았다.
하지만 ‘모범생’이었던 박 최고위원도 남동생과 잦은 다툼을 벌였다. 잊지 못할 다툼 중의 하나가 바로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있을 때다. “남동생에게 ‘배워야 한다. 고등학교에 가라’고 권유를 많이 했어요. 그런데 동생은 저에게 ‘형이 공부를 잘하니 형이 대학에 가라. 형을 위해서 돈을 벌겠다’라고 말하더군요. 집안 형편이 두 명을 모두 가르칠 수 없었기 때문에 형제간에 서로 양보하려고 다퉜죠. 결국 제가 대학을 진학하기로 결정을 봤어요. 심적으로 저에겐 그게 큰 부담이었나 봐요. 서울대 법대에 두 번 낙방하고 말았어요. 다행히 어머니와 동생은 저를 믿어줬죠. 그리고 저의 공부를 위해서 서울 판잣집을 얻어 막노동하는 사람들을 상대로 밥장사를 시작했어요. 어머니가 밥을 푸면 저는 밥을 나르는 일을 하면서 삼수 끝에 합격했어요.”
박 최고위원은 특수 수사통으로 명성을 날렸다. 그는 81년 저질연탄 사건을 맡아 동력자원부 석탄국장을 수뢰혐의로 구속시키기도 했다. 당시 ‘날아가는 새도 떨어뜨린다’던 전두환 대통령의 처삼촌 A씨가 광업진흥공사 사장으로 있던 군사독재시절, 석탄과 연탄산업 장려금 배정권한을 쥔 막강한 석탄국장을 구속시켜 초임시절부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때문에 ‘차기 검찰총장, 법무부장관감’이라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압력도 많았다. “정치권력과 관계가 되는 사건이 있을 때는 압력이 들어오더군요. 상부를 통해서 오는 경우도 많았어요. 그래도 일단 ‘선공후사(공적인 일을 먼저 하고 사사로운 일은 뒤로 미룬다)’의 직분을 수행하는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고 나니 처음에는드셌던 압력이 갈수록 줄어들더군요.”
박 최고위원의 소신은 97년 대선을 앞두고 빚이 났다. ‘DJ 비자금 사건’에 대한 수사 유보를 강력 주장, 수사유보 발표문을 직접 작성했다. 그 당시 박 최고위원은 “청와대의 지시로 권력기관들이 총동원되는 집권당의 음모와 흉계에 검찰이 하수인이 될 수 없다”라고 작성했다.
박 최고위원의 ‘소신’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눈에 띄었다. 단 한 번도 일면식이 없었던 박 최고위원을 법무비서관으로 임명했다. 이를 계기로 박 최고위원은 정부 요직 인사의 검증과 추전을 하는 공직기강 업무를 맡았다. 인사문제로 홍역을 치를 당시 박 최고위원은 정치권 실세와 대통령 아들로부터의 인사 청탁도 단호히 배제함으로써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낸다”고 볼멘소리를 듣기도 했다. 그렇지만 김 전 대통령은 그의 소신을 믿었고, 결국 그의 말을 따르기도 했다.
박 최고위원에게 김 전 대통령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봤다. “한마디로 모시기 쉬웠어요. 논리적이고 합리적, 그리고 원칙주의자였어요. 밖에서는 잘못 알려져 있는데 어떤 보고를 할 때 김 전 대통령과 견해가 다르더라도 논리와 합리성이 인정되면 곧바로 수용하셨어요. 특히 해박한 전문지식이 아주 돋보이는 분이예요. 아주 자상하고 인간미가 철철 넘치는 분이죠.”
거침없는 질주를 하던 박 최고위원은 ‘옷 로비 사건’에 연루되면서 인생의 암흑기를 걷게 됐다. 그리고 사직서를 제출했다. 김 전 대통령이 만류했지만 국민의 정부에 막대한 상처를 줄 수 있다는 이유였다. 그래서 순순히 법무비서관 자리를 내놨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날고 솟고 했는데 그 때는 참 깊은 낭떠러지로 곤두박질치는 느낌이었어요.”
힘들었다. 나라종금 사건, 현대건설 뇌물스캔들에 휘말리면서 정신적 충격은 물론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았다. 한 차례의 고비를 넘기면 또 다른 시련이 다가왔다. 심장까지 열어 보이고 싶다는 생각까지 하면서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자신의 무죄를 밝히려 애썼다.
특히 참여정부 시절 현대건설 뇌물스캔들에 휘말려 고생했던 박 최고위원은 2008년 노 전 대통령을 만났다. 그 자리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은 “미안하다. 민주당하고 박주선 최고위원을 구별했어야 되는데 그걸 못했다”라며 “앞으로 좋은 일만 있지 않겠느냐. 언제 한 번 소주한잔 마시면서 회포를 풀자”라고 말했다.
박 최고위원은 대학 4학년 때 미팅으로 아내를 만났다. 사연도 기구하다. 사법고시 2개월을 남겨둔 시점에서 공부에 매진하고 있던 그는 미팅에 나갈 마음이 전혀 없었다. 그러나 인원이 부족한 탓에 박 최고위원은 끌려나가다시피 했다. 대신 전제조건이 있었다. 미팅 주선자에게 마음에 드는 여성, 지금의 아내와 파트너가 되게끔 해달라는 게 주된 내용이었다. 그러나 군대를 다녀온 복학생이 아내를 마음에 들어해 어쩔 수 없이 양보를 해야 했다. 그런데 미팅 방식에서 문제가 생겼다고.
“그 당시 ABC로 짝을 맞추었어요. 저는 A를 받았지만 복학생이 양보를 해달라고 해서 F를 받았죠. 여성쪽 미팅 주선자도 아내에게 A를 주니깐 ‘뭐가 잘났다고 A야, F줘’라고 해서 F를 받았던 거예요. 결국 아내와 저가 커플이 되어 버렸어요. 한마디로 운명적이죠.”
그러나 이 만남은 오래가지 못했다. 사법시험에 수석으로 합격했던 박 최고위원에게 아내는 이별을 고했다. 어려운 환경에서 자랐던 만큼 좋은 혼처를 선택해 좋은 집안과 결혼하라는 것이었다. 이를 받아들이지 못한 박 최고위원은 아내에게 계속적으로 구애를 했지만 아내는 그를 쳐다보지 않고, 심지어 만나주지도 않았다.
그리고 3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의정부에서 군법무관으로 일했던 그는 우연히 버스 안에서 아내를 만났다. 좋은 기회를 놓치면 안된다는 생각에 박 최고위원은 여러 차례 구애를 했고, 결국 아내는 승낙을 했다. 그러나 결혼은 쉽지 않았다고 한다. “장모님이 장남한테는 진저리가 나 딸을 줄 수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장모님을 수차례 만나서 설득에 설득을 했더니 겨우 승낙해주시더라고요.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미안해요. 저를 만나지 않고 다른 남자를 만났다면 힘든 인생을 살지 않았을텐데…. 그래서인지 아내에게는 정말 미안해요. 이러한 어려움을 모두 다 극복해줬음에도 불구하고 제가 신경을 못 쓰거든요. 오죽했으면 아내가 ‘지금 하는 일에 1천분의 1만 가족에게 해도 최고의 가장이 될텐데…’라고 하겠어요.”
아내는 박 최고위원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고 한다. 박 최고위원은 스스로 양복을 사 입은 적이 없다. 때문에 20여년이 넘게 입은 양복이 수두룩할 뿐 아니라 일부는 헐었다. “한 번은 지방 출장을 가는데 바지가 헐어 구멍이 났더군요. 할 수 없이 식당에 앉아 파자마를 얻어 입고 세탁소에 가서 꼬매 입었어요. 그랬더니 아내는 ‘망신을 다주고 다니는구만!’이라고 말하더군요.”
박 최고위원은 인터뷰 당시에도 양복 주머니가 헐어 터지기 일보직전이었다. 기자는 “최고위원의 품위는 지켜야죠”라고 농을 치자 박 최고위원은 “새옷만 입고 다닌다고 해서 일이 잘 풀리나요. 단정하면 되죠. 옷을 이렇게 입고 다닌다고 해서 저는 전혀 부끄럽지 않아요”라고 웃음을 지어보였다.
[스포츠서울닷컴 정치팀 ptoday@media.sportsseoul.com] 폴리피플들의 즐거운 정치뉴스 'P-TO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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