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프볼=곽현 기자] ‘장신 슈터’ 양희승(42)을 기억하는 팬들이 많을 것이다. 농구대잔치 시절 고려대 멤버로 활약했고, 프로농구에서는 LG, SBS(현 KGC인삼공사), KCC 등에서 선수생활을 했다. 2009년 kt를 끝으로 그는 선수생활을 마쳤다. 대부분이 은퇴 후 지도자로 활동하며 농구계에 남아있는데 반해 그는 그동안 소식이 뜸했다. 수소문 끝에 양희승을 만났다.
※본 기사는 농구전문잡지 점프볼 12월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농구계요? 돌아가고 싶죠
“잘 지내셨습니까?” 현역 은퇴 후 좀처럼 얼굴을 보기 힘들었던 그를 만났다. 현역 시절과 큰 차이 없는 몸매를 유지하고 있었다. 현재 한 골프전문 채널에서 방송을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그동안 농구계에서 그를 보기 힘들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양희승은 농구계로 돌아가는 것에 대해 조심스러워 했다. 자칫 안 좋은 인상을 심어줄 수 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농구계요? 돌아가고 싶죠. 제 인생의 반이 담겨있는 곳이니까요. 농구 관련 일을 하고 싶은 생각은 있어요. 계속 경기도 보고요. 근데 안 좋은 소리 듣기가 싫어서…. 괜히 남의 자리 뺏는다는 인식을 줄까봐서요. 조심스러운 부분도 있어요. 농구가 잘 됐으면 좋겠죠. 저도 농구인이었는데, 농구가 예전 인기를 찾았으면 좋겠어요.” 하고 싶은 얘기가 많은 것 같았지만, 그는 더 깊은 속은 드러내지 않았다.

잊을 수 없는 대학 첫 우승
90년대 농구 팬이라면 양희승을 모를 수 없을 것이다. 농구인기가 절정이던 그 시절, 양희승은 고려대를 대표하던 선수 중 한 명이었다. 전희철(SK 코치)과 김병철(오리온 코치), 현주엽(MBC 스포츠+ 해설위원), 신기성(신한은행 감독) 등과 베스트 멤버를 이룬 그는 195cm의 장신 슈터로 각광받았다. 프로에서는 LG에서 데뷔해 SBS, KCC, kt 등에서 뛰었다. 프로 통산 13.6점을 기록했다. 그렇다면 양희승이 기억하고 있는 자신의 인생경기는 무엇일까?
“글쎄요. 막상 꼽으려고 보니 잘 생각이 나지 않네요.” 잠시 망설이다 다시 말을 이어갔다. “프로 경기는 잘 기억이 안 나요. 위닝샷을 넣고 이긴 경기도 있었는데, 그건 저에게 별로 의미가 없어요. 굳이 꼽자면 대학교 1학년이었던 1993년 종별선수권에서 우승한 경기가 가장 기억에 남아요.” 그는 프로시절 경기를 제쳐두고 대학 우승을 첫 손가락에 꼽았다. 오랜 기다림과 노력 끝에 일군 첫 우승이었기 때문이다.
“고등학교(광주고) 때까지 한 번도 우승을 못 했어요. 대학 1학년 때 첫 대회로 MBC배를 나갔는데, 그 땐 못 뛰었죠. 당시 고려대 분위기가 정말 살벌했어요. 겨울에 반바지를 입고 체육관 양쪽 문을 다 열어놓고 훈련을 했어요. 선배들 눈치 보느라 물도 제대로 못 마셨어요. 화장실 변기 위에 물통이 있잖아요. 그 물에 수건을 적셔서 짜먹기까지 했다니까요(웃음). 또 발목을 삐었는데, 아프다고 얘기를 못 하겠는 거예요. 그래서 참고 뛰다가 부상이 악화 되서 3개월을 쉬기도 했어요.” 그랬던 양희승에게 반전의 기회가 찾아온다. 바로 종별선수권대회(1993년 9월 7일~9월 15일)였다.
“종별선수권을 나갔는데, 그 때 (전)희철이 형이 어깨 탈골로 못 뛰었어요. 준결승에서 연세대를 만났는데, 전반까지 20점을 지다가 후반에 역전승을 했죠.” 당시 연세대는 문경은, 이상민, 우지원, 서장훈 등이 주축이 된 막강한 전력을 자랑했다. 라이벌에 역전승을 거둔 고려대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었다. 결승 상대는 김영만, 김승기, 조동기, 홍사붕, 양경민으로 구성된 중앙대. “정말 치열했어요. 연장전까지 가서 이겼는데 연장전 10점 중에 제가 6~7점을 넣었어요. 정말 기분이 좋았죠. 제가 잘 하고 못 하고를 떠나서 첫 우승이었잖아요. 그래서 소중하고 의미가 있어요.” 신입생이 결승 연장전에서 거둔 활약. 양희승은 1학년 때부터 자신의 가능성을 증명했다. “그때 (이)지승이 형이 자유투를 얻었는데, 못 넣은 걸 무리하게 잡으려다 (홍)사붕이 형한테 파울을 해서 자유투를 준 거에요. 그 때 사붕이 형이 다 넣었으면 우리가 졌을 거예요. 다행히 1개를 못 넣어서 우리가 이겼죠. 아마 졌으면 그 형은 역적 됐을 거예요(웃음).”
제48회 전국남녀종별선수권
일시_1993년 9월 7일~15일
장소_한양대체육관
순위_
우승 고려대
준우승 중앙대
3위 연세대
고려대 전적
고려대 93-73 경희대
고려대 108-80 건국대
고려대 85-74 성균관대
고려대 81-79 연세대
고려대 93-74 명지대
고려대 77-67 한양대
고려대 79-78 중앙대*
*-연장전

아쉬움 남는 마무리
양희승에게 프로선수로서는 기억나는 경기가 없냐고 묻자, 그는 아쉬웠던 경기를 꼽았다. “2001-2002시즌 4강 플레이오프였어요. SK와 만나 4차전에 갔죠. 우리가 2승 1패로 이기고 있어서 4차전을 잡으면 끝나는 상황이었죠. 전주에서 열린 경기였는데, 3점슛을 던질 때 허남영(SK 코치)이 절 덮쳤어요. 슛이 성공됐는데, 심판이 공격자 파울을 분 거에요. 1분 정도 남아서 득점이 인정되면 5점으로 앞서서 우리가 잡는 경기였거든요. 전 정상적인 슛이었기 때문에 억울했죠. 결국 5차전에서 SK에 졌어요. 우리가 올라가는 경기라고 생각했는데…. 농구인생에서 제일 아쉬운 경기였죠.”
그는 프로생활을 통틀어 챔프전에 오른 적이 없는 것이 가장 아쉽다고 말했다. 자신의 인생경기로 대학시절 우승을 꼽은 이유였다. “욕심이 많아서 좀 아파도 참고 하는 스타일이에요. 선수 시절 동안 무릎 수술 3번, 아킬레스건 2번, 어깨 수술 1번을 했어요.” 잦은 수술 탓에 몸 상태가 좋진 않았지만, 서른여섯까지 농구를 했을 만큼 자기관리가 철저한 선수였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농구인생에 있어 아쉬움이 더 많다고 한다. “남들은 그 정도 했으면 괜찮지 않냐고 해요. 그래도 ‘양희승’이라는 이름을 사람들이 많이 알아주지 않냐고요. 근데 전 제 농구인생이 실패했다고 봐요.”
충격적이었다. 여전히 대다수 프로선수보다도 유명한 그가 자신의 농구인생을 ‘실패’라 말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말년이 너무 안 좋았어요. 잘 했다면 그런 대접은 안 받았겠지만. 은퇴식도 못 해보고 선수생활을 접었으니까요.” 그렇다. 양희승은 선수로서 제대로 된 은퇴식도 못 해보고 코트를 떠났다. 비록 역사에 남을 기록은 남기지 못했지만 그는 3점슛을 논할 때 빠지지 않는 선수였다. 프로농구 역사상 3점슛 900개를 성공시킨 선수는 전, 현역을 통틀어 겨우 9명뿐이다. 양희승도 그 중 한 명이다. 2004-2005시즌 SBS의 전설적인 15연승 기록이 작성될 당시에는 주전 포워드로 활약했다.
그러나 코트를 떠나던 양희승을 위한 무대는 어디서도 마련되지 않았다. 이야기를 들으면서 복귀를 조심스러워 했던 양희승의 입장도 이해가 됐다. 오랫동안 헌신해온 스타를 우리는 너무나 쉽게 떠나보낸 것이다. 선수 입장에서는 허무할 수도 있었을 것.
하지만 그것이 곧 ‘원망’을 의미하진 않았다. 양희승은 농구를 한 덕분에 분명 얻은 것이 더 많다고 강조했다. 농구에 대한 고마움도 함께 전했다. “농구에 감사하죠. 농구가 아니면 제가 어디 가서 그런 대접을 받겠어요. 대학 때부터 많은 분들이 알아봐주셨고, 친절하게 대해주셨죠. 때론 힘들기도 하고 서운한 적도 있었지만, 그래도 농구인의 한사람으로서 농구가 많은 사랑을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센터에서 슈터로 변신한 남자
대학 시절 양희승의 등장은 농구계에 신선한 충격이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195cm면 당연히 센터를 봐야 하는 신장이었다. 한데 그렇게 큰 선수가 3점슛 라인을 오가며 슛을 던졌으니 주목을 끌 수밖에. “고등학교 때는 센터에 가까웠죠. 그 때는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치고 다 할 때니까요. 처음 대학에 들어갔을 땐 감독, 코치님께서 제게 가드를 시키려고 하셨어요. 근데 가드는 적성에 안 맞았죠. 다음 해에 (신)기성이도 들어왔고요. 그래서 감독님이 슈터를 권유하시더라고요. 팀에 희철이 형이 있었으니까요. 재밌었어요. 포지션을 바꾸는 과정이다 보니 노력할 부분이 많았죠. 힘들긴 해도 센터들 끼고 돌아다니면서 열심히 했죠. 묵묵하게 열심히 한다고 ‘돌쇠’란 별명도 얻었어요. 그래도 그때 경기했던 게 가장 기억에 남아요. 나가면 결승이었으니까요. 즐거웠죠.”
양희승은…
1974년생인 양희승은 광주고 출신으로 1993년 고려대에 입학했다. 농구대잔치 시절 고려대 황금멤버로 활약했고, 당시로선 보기 드문 장신 슈터로 각광받았다. 1997년 LG 창단멤버로 프로에 입단해 팀의 에이스로 활약했다. 현대를 거쳐 2002년 SBS로 이적했고, 2004-2005시즌 SBS가 정규리그 15연승을 질주할 당시 주전 포워드로 힘을 보탰다. 2007년 kt로 이적한 그는 2009년에 12년간의 프로 생활을 마치고 현역에서 은퇴했다. 정규리그 통산 6,617점 1,100리바운드, 906어시스트를 기록했고, 3점슛은 900개를 성공시켰으며 역대 9위에 올라 있다.
#사진 - 문복주, 유용우 기자, KBL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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