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답사일번지 강진

영랑의 슬픔이 어린 영랑생가

남촌 윤승식 2012. 8. 4. 17:33

 

장흥에서 강진읍으로 들어오는 길목인 강진중학교 앞의  ;영랑로터리에는 우리 나라 서정시의 대표적 시인으로 꼽히는 영랑 김윤식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북(北)에 소월이라면 남(南)에는 영랑이라던 그 영롱한 서정의 극치야말로 오늘날에도 아낌없는 찬사로 회자되고 있는데, 영랑은 그의 시심이 뿌리를 내린 고향 강진 어귀에 서서, 아직도 모란이 피는 찬란한 봄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영랑 김윤식이 태어나서 유년 시절을 보낸 곳이 강진군청이 있는 강진읍 탑동 마을이다. 영랑 생가는 영랑의 부친이 대지주였으므로 대지가 넓고, 집 주변에는 동백나무가 많은데 늦은 겨 울과 이른 봄까지 꽃을 피운다. 뒷편 대밭에는 야생 차나무가 자라고 있다. 소슬대문을 지나 오솔길을 따라 언덕에 오르면 강진 보은산(북산)이 있고, 보은산에서 내려다보면 바로 아래 생가가 있고 강진의 젖줄인 탐진강이 유유히 구강포로 흘러 강진만을 만들고 있으며 저 멀리 다산초당과 백련사가 있는 만덕산이 보인다.

영랑은 1903년 1월 16일 이곳 강진읍 탑동에서 김종호의 5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915년 강진 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1917년 휘문의숙에 진학하였다. 기미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독립선언문을 감추어 가지고 고향으로 내려와 그해 4월 4일 (강진 장날) 만세운동을 기도하다가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대구 형무소에서 6개월간 복역하였다.

1920년 일본으로 건너가 청산학원 중학부에 적을 두었는데 이때 용아(龍兒) 박용철 선생과 친교를 맺었다. 1921년 일시 귀국하고, 1922년 다시 일본에 건너가 청산학원 영문과에 입학하였으나, 관동대지진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하여 고향으로 돌아왔다.고향의 생가로 돌아온 영랑은 민족 수난의 한과 비애를 달래기 위해 대나무 숲에 싸인 생가의 사랑에서 손수 북을 치면서 시를 읊었다.

1931년 박용철, 정지용, 이하윤, 정인보 선생 등과 『시문학』 동인으로 시작활동에 참여하여 그해 3월 창간호에 『모란이 피기까지는』등 4행 소곡 6편을 발표하였고, 1935년에 『영랑시집』을 발간하였다.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면서 최남선, 이광수, 노천명, 서정주 등이 일제에 꺾여나갈 때 영랑은 김정한 처럼 붓을 놓고 지조를 지켰다. 광복을 맞은 영랑은 우익 청년 운동에 정열을 쏟았으며 1945년 이승만 대통령의 부름을 받아 공보처 출판국장으로 7개월간 일했다.

1950년 6·25 동란이 발발하자 서울에서 은신하였으나 9·28 서울수복 때 복부에 포탄 파편을 맞아 그 다음 날인 9월 29일 서울 자택에서 사망하였다. 영랑은 그의 생애를 통하여 81편의 시를 남겼으며, 그중 60여편 정도가 해방전 우리 강진에서 칩거하면서 창씨 개명과 신사 참배를 외면하였으며, 모란을 가꾸며 동백, 대나무 등이 가득한 남성리 집에서 썼다.

그래서 그의 시엔 우리강진의 풍토와 사투리가 담겨져 있으며, 10편 정도는 민족 정신이 많이 배어 있다. 영랑은 1931년 박용철, 정지용등과 중심이 되어 창간한 『시문학』지 1호를 통하여 '동백이 빛나는 마음', '언덕에 바로 누워',,누이의 마음아 나를 보아라' 등의 시를 발표하였으며, 여기에 실린 13편의 시는 민족주의 문학과 계급주의 문학의 대립을 겪으면서 한국 순수 서정시의 형성과 전개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시문학 2호에는 '고흔 봄길위에' 외 8편을, 3호에는 '내 마음 아실이' 외 6편을 발표하여 우리 시문학사에 상당한 위치를 가름하는 순수 서정시를 계속 발표하였다. 영랑은 '북의 소월,남의 영랑';이라 할 정도로 1930년대 전반기의 우리 시문학사의 보배이었고, 우리말을 제대로 못쓰게 하던 일제 식민 시절 우리말의 아름다움과 우수성을 시에 끌어들여 순수시를 만들어낸 시인중의 한 사람이었다.

영랑생가는 당초 3채의 초가였으나, 대문이 있던 사랑채는 뜯겨져 없어졌으며 안채와 사랑채는 기와로 바뀌어 졌다.최근에 다시 초가로 지붕을 복원하였다.
그동안 개인소유로 되어있던 생가를 강진군에서 매입하였으며, 1986년 2월 7일에는 지방 기념물(제 89호)로 지정되어 관리하고 있다.

영랑이 낳고 자란 이 고장 강진에는 '모란촌 문학동인'를 비롯 '모란수퍼' ,'모란갈비',''영랑로터리'. '영랑건설', '영랑로' 등 '모란' 또는 ''영랑'이 들어간 이름이 많다. 그만큼 강진 사람들은 이 고장에서 태어나 유년 시절을 보내고 시작 활동을 한 <모란이 피기까지>의 시인 영랑 김윤식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이다

가는길
강진버스터미널에서 영랑로를 10분쯤 걸어가면 영랑사거리가 나오고 표지판을 따라 3분쯤 가면 생가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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