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고(光州高)

'심기일전'이정현의 그 때 그 순간

남촌 윤승식 2016. 12. 6. 16:35

[응답하라 인삼공사] ‘심기일전’ 이정현의 그때 그 순간      

뜨거운 공격력으로 팬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인삼공사 선수들. 그러나 이러한 모습이 갑작스레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그들에게 지금 이 순간이 있기까지는 농구와 함께한 수많은 시간이 있었다. 그래서 지난 시절의 앨범을 펴 선수들의 추억 한 장을 골랐다. 잠시 잊고 있던 과거와 함께 그들은 어떤 이야기를 털어놓았을까.

 


이번엔 인삼공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존재인 이정현의 추억을 꺼냈다. 그 당시 사진과 함께 광주고, 연세대 시절의 얘기를 나누자 새삼 놀랄만한 얘기가 나왔다. 코트 위의 이정현을 못 봤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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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선수들과는 다르게 이정현은 외모와 체격이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이에 대해 이정현은 “고등학교 때 노안이었다. 이제야 그 점이 빛을 발하는 것 같다. 체격은 오히려 고등학교 때가 더 좋았다. 그때는 가드가 아닌 포워드였다”라며 웃었다. 이와 함께 “오랜만에 보니까 되게 나 같지 않다. 어린 내 모습을 보니까 이상하다. 나에게도 이런 시절이 있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고 전했다. 이정현은 이렇게 과거의 ‘나’를 만났다.

 

광주고 시절, 이정현에게는 ‘득점 기계’라는 수식어가 늘 따라다녔다. ‘이정현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광주고는 우승 후보가 됐다’, ‘광주고의 모든 득점과 패스는 이정현의 손에서 나온다’는 기사 속 문장 또한 있었다. 그렇다면 본인이 생각하는 광주고 이정현은 어땠을까?

 

“광주고 때는 지방 팀이다 보니 서울의 팀들에 비해서 선수층이 두텁지 않았다. 그렇다보니 내가 이끌어가는 부분이 더 많았다. 원래 가드를 봤지만 팀 사정에 맞춰 포워드도 보고 센터도 봤다. 혼자 거의 다 했으니 개인 기록이 좋았던 것 같다. 팀에서 나에 대한 공격 옵션도 많이 만들어줬기에 그런 기록을 낼 수 있지 않았나 싶다. 또한 그때는 내가 지금 체격이나 다름없었다. 고등학교 가드, 포워드 선수들도 다 나보다 덩치가 작았다. 그래서 힘으로 앞서는 경우가 많아 더 유리하지 않았나 싶다.”

 

체격적으로 유리했기에 당시 코치들은 이정현에게 포스트 업 연습을 많이 시켰다. 그렇기에 지금 이정현은 슈터라는 이름에도 포스트 업에 능한 선수가 됐다. “그때의 경험이 많은 도움이 됐다. 내 입으로 말하기는 그렇지만 다른 슈터들보다 조금 더 다재다능하지 않을까 싶다. 여러 가지를 할 줄 아니 말이다.”

 

모든 포지션을 다 소화했던 광주고 에이스는 2005년, 추계 연맹전에서 55득점을 올리며 그 당시 본인의 최다 득점 기록을 만들었다. 이 또한 본인이 중심이 된 공격옵션이 많아서 일어난 결과였을까? 이 얘기를 넌지시 전하자 이정현은 “명지고와의 경기였던 것 같다”며 바로 기억을 소환했다.

 

“그때는 농구가 재밌었다. 내가 하고 싶던 대로 다했으니 말이다. 1번(포인트가드)을 보고 싶으면 1번을 봤고, 다른 포지션을 보고 싶으면 그 포지션을 봤다. 동기들이 워낙 다들 착해서 내가 원하는 대로 해줬던 것도 있다. 또한 그때 주장이고 팀을 이끌어가는 입장이다 보니 더욱 선수들이 잘 받쳐줬던 것 같다. 최다득점의 그날은 아직도 기억이 나는데, 슛 컨디션이 좋았다. 그날 리바운드, 어시스트, 스틸 다 많이 했던 것 같다.” 이정현의 기억대로 이날 이정현은 55득점 속에 3점슛 6개, 6어시스트 7스틸을 만들었다. 1쿼터에만 24득점을 몰아넣었다. 전천후 활약. 이 다섯 글자가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경기력이었다.

 


이후 이정현은 연세대로 진학했다. 이정현의 대학 시절을 찾아보다가 2008년, 이정현이 3학년 시절, 농구대잔치 프리뷰 기사에서 이러한 구절을 발견했다. ‘힘과 투지가 좋은 이정현이 오랜 방황을 뚫고 공격력에 힘을 실어줄 것이다.’ 방황. 지금의 이정현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두 글자였다.


“대학교 1학년이 되며 적응을 못했다. 그 당시 4학년에 (양)희종이 형, (김)태술이 형, (이)광재 형 등이 있었다. 형들이 너무 잘하다 보니 당연히 고등학교 때 내가 하던 농구가 안 되더라. 당황하기도 했지만 형들보고 배우는 점도 많았다. 그러다 형들이 졸업하고, 2학년 때 감독님 또한 바뀌며 적응을 많이 못했다.”

 

급작스러운 환경의 변화가 이정현을 방황하게 만든 것이었다. 그러다 더욱 예상치 못한 말이 이정현의 입에서 나왔다. “그때 방황을 많이 했다. 그래서 운동을 그만두기도 했다."

 

이정현이 운동을 그만 뒀었다니…. 두 귀를 의심했다.

 

“2학년 때 아마 정기전을 앞두고 있을 때였다. 운동도 안 되고 너무 힘들어서 짐을 싸 광주로 내려갔다. 한 달은 놀았던 것 같다. 갔다 와서 운동을 다시 열심히 하긴 했지만 2학년 말에 무릎 부상을 심하게 당하면서 3학년 초·중반까지 경기도 많이 못 뛰었다. 운동량 또한 많아서 적응을 못하기도 했다. 그때가 정체기였다. 운동도 하기 싫었고, 힘든 시간을 보낸 것 같다.”

 

이정현은 짐을 싸 고향인 광주로 내려갔다고 했다. 그런 그가 방황을 끝마치고 다시 농구선수로서의 생활을 이어가게 된 데에는 부모님이 있었다.

 

“그때 운동을 그만두고 집에 가서 2주 동안 하고 싶은 것 다 했는데도 부모님이 아무 말씀 안하시더라. 그러다 언제 부모님과 밥을 먹는데 아버지가 ‘이제 가야지?’라고 하셨다. 아버지의 그 한마디에 ‘네 갈게요’라고 했다. 만약 부모님이 ‘야, 농구해’라고 재촉을 하셨으면 더 안했을 지도 모를 일이다. 내가 힘든 것을 아시고 보듬어 주시고 기다려 주셔서 마음을 다잡고 다시 올라올 수 있었던 것 같다.”

 

이후 다시 연세대에 돌아오며 이정현은 정재근 전 감독의 농구 내·외적 가르침으로 스스로 본인의 가치를 올려야겠다는 다짐도 해나갔다. 그렇게 이정현은 마음을 가다듬고 ‘에이스’라는 수식어를 되찾았다.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농구 외에 생각해보지도 않았는데 그때 너무 힘들었고 자존감도 많이 무너져있는 상태였다. 2·3학년 때는 경기에 많이 나서지도 못했기에 선수라고 할 수도 없었다. 프로에 갈수 있을까라는 생각도 많이 했었다. 그래도 3학년 후로 마음을 다잡고 열심히 해서 지금의 내가 있게 된 것 같다.”

 


그렇게 이정현은 4학년, “연세대 4년 중 가장 화려했던 때”라고 돌이킬 수 있던 시절을 맞았다. 고려대와의 정기전, 전국 체전, 2차 연맹전에서 우승을 하며 승승장구 했다. 2차 연맹전 때는 수비상의 영예도 안았다. 특히 전국 체전에서 이정현은 25득점 7리바운드 2스틸을 기록하며 상무의 2연패를 저지,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그리고 4학년 마지막 대회인 2009년 농구대잔치에서 연세대, 그리고 이정현은 시즌 3관왕에 도전을 했다. 예선전에서 상무와 다시 만났다.

 

“우리가 체전 때 상무를 이기지 않았나. 체전 때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나섰지만 형들이 컨디션도 안 좋고 해서 운 좋게 이겼다. 나중에야 들은 얘기지만 형들이 그때 이후로 우리 때문에 휴가도 못 나가며 이를 많이 갈았다고 하더라. 그래서인지 농구대잔치 때 형들이 엄청 거칠게 했다. 희종이 형이 나를 엄청 밀어붙여서 공도 못 잡았다. 그렇게 독이 오른 희종이 형의 모습을 처음 봤다. 경기 전에도 인사를 하면 평소에는 친근하게 받아주는데 그때는 ‘어, 그래’라며 선을 긋더라. 전의를 불태웠던 것 같다.”

 

“형들이 마음먹고 제대로 하면 우리는 상대가 안 됐다”는 이정현의 말처럼 연세대는 상무와의 예선전에서 2쿼터부터 20점 내외로 벌어지며 패했다. 그러나 연세대는 무난히 토너먼트에 안착, 결승에 올랐다. 결승 상대는 다시 상무였다. “결승에 가며 우리도 욕심이 났다. 유종의 미를 거두고자 열심히 했다.” 그러나 이내 곧 당시를 회상하던 이정현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결승전 결과를 대변해주는 한숨이었다. “형들이 더 열심히 하더라. 희종이 형에, (신)명호 형까지 있었을 때다. 진짜 숨도 못 쉬었다.”

 

이후 상무에서 군 생활을 하며 이정현은 양희종의 마음을 십분 이해하게 됐다. “형이 일병(후임) 시절이라서 더욱 그랬던 것 같다. 나도 프로아마 최강전과 전국 체전 때 고려대에게 지며 대학 선수들에게 지면 어떻게 되는지 느꼈다. 그래서 ‘대학교 때 했던 것을 그대로 내가 당하는 구나’ 싶었다. 희종이 형에게 그런 얘기를 전하니 ”야, 것 봐. 너희도 그렇지?“라고 하더라. 당연히 그 다음 농구대잔치에서는 고려대를 상대로 이겼다. 이를 갈고 임했다.”

 

지방 팀이다 보니 제대로 된 성적을 못 내고 ‘광주고 이정현’이라는 말만 들어서 아쉬웠던 광주고 이정현과 ‘정체돼 있다. 발전이 없다’는 소리를 들으며 프로에 대한 고민을 심각하게 했던 연세대 이정현.

 

지금의 이정현이 그때의 이정현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없을까? 이정현은 한창 방황하던 대학교 2학년의 이정현에게 이러한 말을 전하며 인터뷰를 마쳤다.

 

“방황도 많이 했지만 잘 참고 버티며 농구를 안 놓아줘서 고맙다. 만약 내가 그 당시 아는 형, 친한 지인이었다고 한다면 ‘버티는 것이 이기는 것’이라고 말 해주고 싶었을 것 같다. 지금까지를 돌아보니 인내하고 열심히 나에게 주어진 일을 하다보면 언젠가 기회가 오더라. 할 수 있는 것이 농구 하난데 힘들다고 포기해버리는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때는 어려서 그런 것을 잘 몰랐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