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남윤씨

해남윤씨에 대해

남촌 윤승식 2012. 7. 17. 16:00

1.시조

윤존부 (尹存富

 

2.시조의 유래

시조 윤존부 (尹存富)는 고려 중엽 때 인물이나 그후 7세손 까지는 출생지와 거주지 등이 분명하지 않다. 중시조인 8세손 윤광전이 고려 공민왕 때 사온 직장 영동정(令同正)을 지내다가 고려가 망하자 아들들을 데리고 해남으로 피하여 살게 되어 본관을 해남으로 하였다. 윤광전의 묘소는 전남 강진군 도암면 계라리 한천동에 있으며 음력 99일에 향사한다.

 

3.성씨 유래

해남 윤씨 (海南尹氏)의 시조(始祖) 윤존부(尹存富)는 고려 중기 때 사람으로 알려졌으나 그의 출생과 상계(上系)에 대해서는 전하는 기록이 없어서 정확하게 상고(詳考)할 수 없다. 그후 7세손까지의 소목(昭穆)도 자세하지 아니하여 고려 공민왕(恭愍王) 때 사온직장(四 直長)을 지내다가 고려의 국운이 기울자 아들 단봉(丹鳳) · 단학 (丹鶴) 형제를 데리고 해남(海南)으로 은둔(隱遁)하여 그 곳에 정착세거(定着世居)8세손 광전(光典)을 중시조(中始祖)로 받들고 본관(本貫)을 해남(海南)으로 삼게 되었다. 그후 자손들의 과관(科官)과 절의(節義)가 면면히 이어져 일찍이 호남지방(湖南地方)에 자리를 잡고 명문(名門)의 지위를 굳혀왔다.

 

4.가문 소개

<기묘명현(己卯名賢)>의 한 사람으로 명망이 높았던 구()는 호당(湖當)에 뽑히고 주서에 이어 홍문관 교리가 되었으나 기묘사화때 영암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나와 복관되었고, 문장능하여 윤선도,류희춘, 최부, 임억령등과 더불어 [ 해남 오현(海南五賢)]으로 일컬어졌다. 그의 아들 의중(毅中)도 직제학과 예조참의, 승지, 대사성 등을 거쳐 이조참판으로 동지춘추관사를 겸직했고, [명종실록]편찬에 참여했다. 1572년 평안도 관찰사와 이듬해 병조참판, 대사헌, 대사간을 역임한후 형조판서에 올랐다가 동인(東人)으로서 정여립의 옥사(獄事)가 일어났을 때 삭출되었다. 부정 유심(惟深)의 아들로 관찰사 유기(惟機)에게 입양했던 고산 선도(善道)는 치열한 당쟁으로 일생을 거의 유배지와 은거지에서 생활하며 유리말의 새로운 뜻을 창조하여 많은 문학작품을 남겼으며, 특히 그의 시조는 정철의 가사와 더불어 조선 시가에서 쌍벽을 이루었고 우리나라 국문학사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다. 그밖에 해남윤씨를 빛낸 인물로는 고산의 증손 두서(斗緖)는 시문(詩文)과 그림에 능통하여 현재(玄齋) 심사정, 겸재(謙齋) 정선 등과 더불어 [삼재(三齋)]로 불리웠고, 그의 아들 덕희(德熙)도 맹영광의 영향을 받아 말()과 신선(神仙)을 잘그려 아버지인 두서과 함께 <쌍절>로 일컬어졌다.

 

5.인구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해남윤씨(海南尹氏)는 남한에 총 11,518가구, 48,780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6.집성촌

전남 해남군 옥천면 성산리

전남 강진군 강진읍 춘전리

전남 해남군 해남읍 평동리

전남 강진군 대구면 수동리

전남 강진군 도암면 지석리, 만덕리

전남 강진군 군동면 화산리

전남 강진군 도암면 계라리, 항촌리

전남 강진군 성전면 신예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