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남윤씨

11. 대동보 병진보(丙辰譜) 제1권(10항-12항)에 실린 금구의록(金溝疑錄) 및 금구현정소단자(金溝縣呈訴單子)에 대한 고찰

남촌 윤승식 2013. 8. 6. 15:31

이 글에는 시조공(始祖公) 6대손 좌의정공(左議政公) ()()의 묘소(墓所)가 전북 금구현(金溝縣)에 모셔져 있다는 말이 전해짐에 따라 우리 선인(先人)들이 그 묘소 찾기에 노력하신 경위가 밝혀져 있다.

본문(本文)17세대손 윤정기(尹廷琦))의 저서(著書) 당악세적(棠岳世蹟)에 실려 있으니 아마도 기사년 대동보 중수 때에 족보에 올린 것으로 생각된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환()공의 묘소는 금구(金溝) 혹은 청주(淸州)에 있다고 하여 왔다. 그런데 임천(林川) 군수를 지낸 후손 윤규범(尹奎範)의 꿈에 신령(神靈)이 나타나 말하기를 내 묘소는 금구(金溝)에 있노라하셨다. 이에 순조(純祖) 기유년(1805)에 각 파()에서 대표를 뽑아 25인이 일행이 되어 전북(全北) 금구 두정리(金溝豆亭里) 상두산(象頭山) 아래 서재동(書齋洞)에 가서 묘소를 찾기 시작하였으니 이곳은 그 지방 사람들이 옛 부터 윤정승 묘지라고 일컬어온 곳이기 때문이다.

끝까지 묘소를 찾아 보았으나 확증을 잡지 못하고 근처에 묘직전(墓直田) 사무(四畝)를 사고 그 지역 안에 환표비(環標碑)만 세워놓고 아무런 소득없이 돌아왔다. 25인 중 23인이 집을 향하여 먼저 떠났고 2인은 아직 여사(旅舍)에 남아 있었는데 어떤 유생(儒生) 2인이 지나다가 말하기를해윤(海尹)들이 이미 떠났구나하면서그 묘소는 곧 환()의 무덤이니라하였다. 남아있던 2인은 이 말을 무심코 들었기 때문에 물어 보지도 않고 돌아왔으나 이 말이 우연히 퍼지게 되니 생각함에 비()가 오래되고 석면(石面)이 허물어져 목변(木邊)의 환자(桓字)가 소변(小邊)의 환자(桓字)로 변하게 된 것이었다. 그 뒤에 덕정동(德井洞) 윤모(尹某)가 묘직전(墓直田)을 팔아 먹고 이로 인하여 비석(환의 묘비 같음)을 묻은 자의 꼬임에 빠져 환묘비(環標碑)를 묻어버려 후일의 증거가 없어져버렸다

이상은 우리 선인들께서 환공(桓公) 묘소(墓所)찾기에 정성을 쏟았던 그 경위를 기록한 일부분이다. 이 밖에도 묘 아래에 살던 이계손(李季孫)이란 자가 환공(桓公) 묘지(墓地)를 타인에게 팔고자 묘비를 갈아 미리 팔아 먹고 나머지 비석은 증거를 없애려고 땅에 묻어 버렸다는 기록이 있다.

그 뒤에 환공(桓公) 묘비(墓碑)를 묻은 자를 그곳에 사는 홍달욱(洪達旭)이란 자가 알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선인(先人)들은 다시 홍달욱 찾아가 백방으로 달래어 묘비를 묻은 자가 누구인가를 캐물었으나 홍가(洪哥)는 끝까지 입을 다물고 말을 하지 아니하므로 할 수 없이 관력(官力)을 힘입어 홍가의 실토를 받고자 하였다.

금구현정소단자(金溝縣呈訴單子)는 곧 홍가를 문초하여 묘비를 묻은 자를 밝혀 주라는 뜻을 갖추어 금구(金溝) 현감(縣監)에게 제출(提出)한 호소문(呼訴文)이다.

이렇게 선인(先人)들 께서는 환공(桓公)찾기에 온갖 정성을 쏟았으나 고생한 보람없이 묘소는 끝내 찾지 못하고 말았다.

여기에 관하여 17대손 정기(廷琦)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병진보 제117항 참조)

알지 못하겠노라 금구(金溝)에 해남윤씨(海南尹氏)의 묘소가 있다는 말을 전해온 자를 그 누구가 있어 확실히 그 잃어 버린 비석 글씨를 보았는가? 해남윤씨(海南尹氏)인가? 아니면 혹시 지방인이 해남윤씨(海南尹氏) 전라도의 명족(名族)이기 때문에 근거없이 보았다고 퍼트린 말이었던가? ()에 하나라도 믿을만한 것이 못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