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답사일번지 강진

다산학의 산실 다산초당

남촌 윤승식 2012. 8. 5. 10:14

 

 

 

다산 정약용에 대하여
1762(영조 38)-1836(헌종2). 조선후기의 문신, 실학자, 소자는 귀농(歸農), 자는 미용(美庸)호는 사암, 탁옹, 태수, 자하도인, 철마산인, 다산, 당호는 여유(與猶), 경기도 광주(지금의 양주군 조안면 능내리 소내 마재)출신. 아버지는 진주목사 재원이며, 어머니는 해남윤씨로 두서의 손녀이다. 4남 2녀 중 4남으로, 1836년 2월 22일 향리에서 죽었다.

13세 때 풍천홍씨와 결혼하여 6남 3녀를 두었으나 4남2녀는 요절하고 학연, 학유와 서랑 윤참모가 있을 뿐이다. 그의 일생은 대체로 3기로 나눌 수 있는데, 제1기는 벼슬살이하던 득의의 시절이요, 제2기는 귀양살이 하던 환난시절이요, 제3기는 향리로 돌아와 유유자적하던 시절이다.

제1기 득의의 시절
제1기는 22세 때 경의진사가 되어 줄곧 정조의 총애를 한몸에 받던 시절로서 암행어사, 참의, 좌우승부지 등을 거쳤으나, 한때 금정찰방, 곡산부사 등 외직으로 좌천되기도 하였다. 정조의 지극한 총애는 도리어 화를 자초하기도 하였다. 16세 때 서울에서 이가환, 이승훈, 등으로부터 이익의 학에 접하였고,23세 때에는 마재와 서울을 잇는 두미협 뱃길에서 이벽을 통하여 서양서적을 읽었다. 유학경전에 관한 연구로는 내강중용강의 내강모시강의 희정당대학강의 등이 있으며, 기술적 업적으로는 1989년 배다리의 준공과 1793년 수원성의 설계를 손꼽는다. 1791년 진산의 윤치충, 권상연의 옥 이후 천주교로 인하여 세정이 소연하던 중 1975년 주문모 신부의 변복잠입사건이 터지자, 정조는 수세에 몰린 다산을 일시 피신시키기 위하여 병조참의에게 금정찰방으로 강등 좌천시켰다. 정조는 다시 그를 1797년에 황해도 곡산부사로 내보내 1799년까지 약 2년간 봉직하게 하였다. 이시절에 마과회통, 사기찬주와 같은 잡저를 남겼다. 내직으로 다시 돌아온지, 채 1년도 못되어 1800년 6월에 정조가 죽자 1801년 2월 책통사건으로 체포, 투옥되니 , 이로서 그의 득의시절은 끝을 내리고 말았다.

제2기 환난의 시절
1801년 2월 27일 출옥과 동시에 경상북도 포항 장기로 유배되니 그의 제2기인 유배생활이 시작되었다. 그해 11월에 전라남도 강진에서 이배될 때까지 9개월간 머무르면서 고삼창고훈, 이아술, 기해방례변등의 잡저를 저술하였으나 서울로 옮기던 중 일실하여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강진에 도착하자 첫발을 디딘 곳이 동문 밖 주막이다. 1805년 겨울까지 약 4년간 사의재에서 묵었다. 유배초기에 다산은 파문괴장 불허안접할 정도로 고적하였지만 주막집의 한 늙은 주모의 도움이 컸었고, 1803년 봄에 인근의 만덕사에서 혜장선사를 만나 유불상교의 기연을 맺었다. 1805년 겨울에는 혜장선사의 배려로 주역연구자료가 담긴 경함을 고성사로 옮겼다. 한편, 9개월 만에 다시금 목리 이학래 집으로 옮겨 1년 반동안 머물렀다. 이학래의 집에서 외가인 해남윤씨의 배려로 옮긴 다산초당은 11년간에 걸쳐서 다산학의 산실이 되었다. "주역사전"은 1808년에 탈고하였고 상례사전은 읍거시절에 기고하였으나 초당으로 옮긴 직후 1811년에 완성하였다. 시경(1810), 춘추(1812)  논어;(1813),맹자(1814), 대학(1814),중용(1814), 악경(1816),;경세유표(1817),목민심서(1818)등을 차례로 저술하였고, 1818년 귀양이 풀리자 고향으로 돌아와서 "흠흠신서와 상서고훈 등을 저술하여 그의 6경 4서와 1표 2서를 완결지었다.

제3기 유유자적의 시절
귀양에서 풀린 그의 제3기에는 회갑 때 자찬묘지명을 저술하여 자서전적 기록으로 정리하였다. 총 500여권을 헤아리는 그의 여유당전서는 대체로 6경4서 1표2서 시문잡저 등 3부로 분류할 수 있다. 먼저 6경 4서의 대강을 살펴보면, 첫째, 시에는 모시강의12권 외에 시경강의보3권이 있다. 시는 풍림이라하여 권선징악의 윤리적 기능을 중요시한다. 악사들로 하여금 조석으로 연주하게 하여 왕자가 그 선함을 듣고 감동하여, 그 악함을 듣고 깨우치게 하니 그 엄함이 춘추보다도 더하다고 하였다. 둘째, 서에는 매씨상서평 9권 상서교훈6권, 상서지원록 7권이 있다. 선기옥형은 상천의 의기가 아니요 홍범구주도 정전형을 본뜬 정치이념일 따름이라고 하였다. 셋째, 예에는 상례사전 50권, 상례외편12권,사례가식9권이 있다. 관혼상제등 사례 중에서도 상례에 치중한 까닭은, 전주교와의 상대적 입장에서 유교의 본령 을 밝히려는 깊은 뜻이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태로, 소로, 특생, 특돈의 예에서 그의 변도나 궤형의 수에는 일정한 법도가 있다. 군왕, 대부, 사의 계급에 따라 차등이 있으므로 멋대로 증감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넷째, 악(樂)에는 <악서고존>3권이 있다. 5성(聲) 6률(律)은 본래 같은 것이 아니다. 6률로써 制樂하므로 악가의 선천이요 5성으로써 分調하므로 악가의 후천이 되기 때문이다. 鄒衍, 呂不韋, 劉安등의 취률정성의 그릇된 학설을 따지는 한편 삼분손익, 취처생자의 설이나 괘기월기, 정반변반 등의 설은 모두 받아드리지 않는다고 하였다. 다섯째, 易에는 <주역사전>24권, <역학서언>12권이 있다. 역에는 4법이 있는데 推移, 물상, 효변, 호체로서 십이벽쾌는 4시를 상징하고 중부, 소과 두괘는 오세재윤를 상징한다. 역에는 역수만 있고 순수는 없으므로 선천괘위의 설은 이치에 합당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여섯째, 춘추에는 <춘추고징 12권이 있다. 좌씨의 책서는 춘추의 전이 아니요 그의 책서는 춘추의 전이 아니요 그의 경의는 해석도 한나라 학자들이 저지른 지나친 잘못이다. 체는 오제의 제사이다. 그런데 주례에서 체제를 말하지 않은 까닭은 그들이 오제를 제사지낸다고 한것이 바로 체제이기 때문이다. 춘추시대에도 상기에는 변함이 없으므로 두예(杜預)의 설은 준수할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 일곱째, 논어에는 논어고금주 40권이 있다.논어는 다른 경전에 비하여 이의가 너무나도 많다. 총520여장중 170여장의 이의를 하나로 묶어서 원의총괄이라 하였다. 그중의 한 예를 들자면, 효제가 곧 인(仁)이니 인이란 총체적으로 붙인 이름이요 효제란 부목으로서 주자의 심덕, 애리(愛理)의 설은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하였다. 여덟째, 맹자에는 맹자요의9권이 있다. 성(性)이란 기호(嗜好)인데 형구(形鷗)의 기호와 영지(靈知)의기호가 있다고 한다. 본연지성은 본래 불가의 책에서 나왔으며 우리유가의 천명지성과는 서로 빙탄(氷炭)과도 같아서 상호간의 비교할 길이 없다고 하였다. 아홉째, <중용>에는 중용자잠(中庸自箴3권, 중용강의보6권이 있다. 용(庸)이란 항상 끊임없이 오래감을 의미한다. 보이지 않는 것은 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요 들리지 않는 것은 내 눈에 들리지 않는 것이니 그 것은 곧 하늘의 모습이요 하늘의 소리이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열째, 대학에는 <대학공의(大學公議3권,희정답대학강의 1권, 소학보전 1권 심경밀험 1권이 있다. 명덕이란 효, 제, 자 삼덕으로서 사람의 영명(靈明)이 아니다. 격물의 물은 물유본말(物有本末)의 물(物)이요 치지(致知)의 지는 지소선후(知所善後)의 지다.

저서
다음으로 1표 2서의 대강을 살펴보면, 첫째 경세유표48권이 있으나 미완본이다. 관제, 군현제도, 전제,부역, 공시, 창저(倉儲), 군제, 과제, 해세(海稅), 마정(馬政), 선법(船法) 등 국가 경영을 위한 제도론으로서 현실적 실용여부는 불구하고 기강의 대경대법을 서술하여 구방(舊邦)을 유신하고자 하였다. 둘째, 목민심서 48권이 있다. 현재의 법도로 인민을 다스리고자 한 것이니 율기, 봉공, 애민을 3기(紀)로 삼았고 거기에다가 이, 호, 예, 병, 형, 공을 6전(典)으로 삼았으며 진황(賑荒)을 끝으로 하였다. 부정행위를 적발하여 목민관을 깨우치게 함으로서 그 혜택이 백성들에게 돌아가도로 하였다. 셋째,흠흠신서 30권이 있다. 인명에 관한 옥사를 다스리는 책이 적었기 때문에 경사(經史)에 근본하였거나 공안(公案)에 증거가 있는 것들을 모아 옥리들로 하여금 참고하게 함으로써 원한의 소지를 없애도록 하였다. 이로서 6경 4서로써 수기하고 1표 2서로써 치인하게 하여 수기치인의 본말을 갖추도록 하였다.

다음으로 시문잡저를 살펴보면, 시문집 18권을 간추려도 6권은 되고 잡문은 전편이 16권, 후편이 24편이다. 또한, 잡찬목록을 보면아방비억고 30권(미완성)이 있고 아방강역고 10권,전례고2권 대동수경 2권, ;소학주관 3권, 아언각비3권 ;마과회통 12권, 의령 1권 등이 있다.

다산학의 산실 다산초당

다산은 귀양살이 8년째 되던 1808년(순조8) 봄. 만덕산 귤동 마을에 터 잡고 살던 해남 윤씨들의 배려로 다산초당(茶山草堂)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모친이 공재 윤두서(尹斗緖, 1668∼1715)의 손녀이고 윤두서는 고산 윤선도(尹善道, 1587∼1671)의 증손이니 귤동마을 해남 윤씨 집안은 다산의 외가 친척들이다.
이곳에서 유배가 풀릴 때까지(1808∼1818) 본격적인 학문탐구와 <목민심서>, 흠흠신서;, ;경세유표 등 방대한 저술활동이 이루어졌다. 사적 제107호인 다산 초당은 강진만(구강포)이 한눈에 바라보이는 만덕산 기슭에 자리하고 있으며, 18년의 유배 생활 가운데 10년을 지냈던 곳으로 다산의 체취가 그대로 간직된 다산4경(정석, 약천, 다조, 연지석가산)을 볼 수 있다.

다산초당은 말 그대로 조촐한 초가삼간이었다. 얼마 전 발견된 초의선사의 [다산초당도]는 초당과 동암이 모두 초가로 그려져 있고, 연지석가산 연못 아래에 지금은 없는 작은 연못이 하나 더 그려져 있다. 세월이 흐르고 무너져 폐가가 된 것을 1958년에 다산유적보존회가 현재와 같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瓦家(와가) 팔작 단층기와집으로 중건하고 후에 선생님께서 생활하셨던 동암(東庵)과 제자들이 유숙한 서암(西庵)을 복원한 것이다.
초당에 걸린 '다산초당' 현판과 동암에 걸린 '보정산방'(寶丁山房:정약용을 보배롭게 모시는 산방) 현판은 모두 추사 김정희의 글씨를 새긴 것이다. 그중 '다산초당' 현판은 추사의 글씨를 여기저기서 집자해 만든 것이지만 '보정산방'은 김정희가 중년쯤 되었을 무렵 일부러 쓴 것 인 듯, 명필다운 능숙한 경지를 보인다. 정약용 선생님의 24년 연하인 추사 김정희는 동배친구 초의선사와 더불어 정약용을 따르며 몹시 존경했다. 한편 동암에는 다산의 글씨를 집자한 '다산동암'이라는 현판도 함께 걸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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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선생이 18년간 이곳 강진에 계셨던 것을 기리기 위하여 강진읍에 위치한 호수공원에 다산동상이 있고, 강진읍에는 '다산로'라는 거리가 있다. 이외에도 다산기념관이 다산초당  근처에 건립되었고,YMCA가 강진군으로부터 위탁 운영하는 다산수련원이 있다. 또한 다산이 강진에 와 처음 머물렀던 주막인 사의제(강진읍 동성리)도 복원되었다.

 



찾아가는 길
<강진읍∼백련사∼다산초당>
버스를 이용한 경우 완행 11회 운행하므로 백련사 입구나 다산초당 입구(귤동마을)에서 내려서 각각 30분씩 걷는다. 백련사 다산초당은 산길로 20여분 걸린다

승요차로는 강진읍에서 귤동마을까지 15분 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