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부 시인 별세
봄·전라도 연작 등
이성부 시인 별세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너는 온다”(<봄> 앞부분)
<봄>과 ‘전라도’ 연작의 이성부 시인이 28일 오전 10시 지병으로 별세했다. 향년 70.
1942년 광주에서 태어난 고인은 광주고로 진학해 김현승 시인의 가르침을 받았으며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해인 1960년 <전남일보> 신춘문예에 당선했다. 조병화·황순원·김광섭 등이 교수로 있던 경희대 국문과에 들어간 그는 대학 재학 중이던 1962년에 <현대문학>에 3회에 걸쳐 추천됐고 67년에는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우리들의 양식>이 당선하면서 등단 절차를 마무리한다.
같은 해 그는 한국일보사 기자로 입사한 뒤 첫 시집 <이성부 시집>을 펴내며 74년에는 두 번째 시집 <우리들의 양식>을 내놓는다. 이해에는 또 시국에 관한 문학인 101인 선언에 서명하면서 진보적 문인 단체인 자유실천문인협의회(한국작가회의의 전신) 창립에 참여하기도 한다.
초기 이성부의 시는 농민과 노동자 등 민중의 고통과 슬픔, 그리고 고향 전라도와 백제 사람들이 겪은 차별과 한을 노래하는 데에 주력한다.
“목에 흰 수건을 두른 저 거리의 일꾼들/ 담배를 피워 물고 뿔뿔이 헤어지는/ 저 떨리는 민주의 일부, 시민의 일부./ 우리들은 모두 저렇게 어디론가 떨어져 간다.”(<우리들의 양식> 끝부분)
“아침 노을의 아들이여 전라도여/ 그대 이마 위에 패인 흉터, 파묻힌 어둠/ 커다란 잠의, 끝남이 나를 부르고/ 죽이고, 다시 태어나게 한다.”(<전라도 2> 첫 연)
이성부는 77년 세 번째 시집 <백제행>에 이어 81년 네 번째 시집 <전야>를 내놓는데, 그사이 고향 광주에서 벌어진 학살에 커다란 충격을 받고 한동안 글을 쓰지 못한다. 광주의 충격과 슬픔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가 택한 것이 산행이었다. 그는 89년에 낸 다섯 번째 시집 <빈 산 뒤에 두고>에서부터 시작해 <야간산행> <지리산> <도둑 산길> 등 산행을 소재로 삼은 일련의 시집을 내놓는다.
“나는 싸우지도 않았고 피흘리지도 않았다./(…)/ 비겁하게도 나는 살아남아서/ 불을 밝힐 수가 없었다. 화살이 되지도 못했다./ 고향이 꿈틀거리고 있었을 때,/ 고향이 무너지고 있었을 때,/ 아니 고향이 새로 태어나고 있었을 때,/ 나는 아무것도 손쓸 수가 없었다.”(<유배 시집 5> 부분)
고통과 절망 속에서도 “더디게 더디게 마침내 올”(<봄>) 봄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았던 시인은 생애 일흔한 번째 봄을 코앞에 두고 영원한 휴식에 들었다.
유족으로는 부인 한수아씨와 아들 준구씨, 딸 슬기·솔잎씨 등이 있다. 빈소는 서울대병원, 발인은 1일 오전 6시 예정이다. (02)2072-2016.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